2. 신성로마제국 - 제 1제국

오늘의 독일 땅인 동프랑크 왕국은 어엿한 독립국가가 되었으나 지방마다 큰 세력을 지닌 호족들이 군사와 재산을 갖고 있었으므로 동프랑크왕국은 사실상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과 다름없다. 동프랑크는 911년 왕위를 물려받을 왕족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왕이 사망함으로써 왕을 선거로 선출하게 된다.(선립군주국) 이렇게 선출된 독일왕들은 선거권이 있는 제후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으므로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독일의 왕권을 처음으로 강화시킨 왕은 작센 지방의 호족인 하인리히 공과 그 뒤를 이어 독일 왕에 뽑힌 오토 1세였다. 특히 오토1세는 교회와 호족을 견제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했으며, 이탈리아 원정에 성공하고, 마자르족과 슬라브족의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962년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것을 독일 역사에서 '제 1제국'이라고 한다. 이 신성 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에게 멸망당하기까지 지속된다.

오토왕 이후 독일의 왕은 자동적으로 황제의 관을 대대로 물려받아 독일왕은 곧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로마 교황과 더불어 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즉 황제권은 세계적인 것을 향한 이념었으며 황제에게는 서양 전체에 대한 지배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정치적 현실이 되지는 못하였다. 독일의 왕들은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아 서구전체의 황제가 되려고 이탈리아 문제에 몰두하느라 독일에서의 중요한 과제들은 관심 밖이 되었다. 그래서 오토왕 이후에 독일에서는 왕권이 많이 약화된 반면 지방의 호족들은 더욱 강대해졌다. 황제는 이탈리아 문제에 있어서도 주교임명권을 둘러싸고 교황과 갈등을 겪게 되며, 이탈리아 도시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황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그후 12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동안 지속된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한때 교황과 이탈리아 북부도시들 및 독일의 제후들을 장악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1254년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콘라드 4세가 죽은 후 독일의 제후들은 황제를 선출하지도 않았다. 제후들에게 있어 신성로마제국과 황제는 거추장스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의 권유에 따라 제후들은 1273년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를 황제로 선출하였다. 루돌프 1세는 이탈리아 경영을 포기하고 독일내에서의 위치를 굳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세 후반에 들어 독일의 제후들과 도시동맹들은 이미 황제와 상관없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황제의 영향력은 자기 영지에만 국한될 정도로 축소되어갔다. 제후들은 또한 카알 4세로부터 금인칙서를 받아냄으로써 그들의 권한을 제도적으로 확정하였다. 이에 따르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대주교와 보헤미아, 작센, 팔츠, 브란덴부르크의 제후 등 7대 선제후에 의해 선출되며, 선거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대관식은 아헨의 대성당에서 거행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금인칙서는 선제후들에게 징세권, 사법권 및 화폐주조권을 허용하는 등 이들의 주권을 확고히 해줌으로써 독일의 내부 분열을 제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당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세습군주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함으로써 민족국가로의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면 독일은 분권화되어 왕권이 약해지고 그 결과 가열된 지방 호족들간의 세력다툼은 독일이 민족국가가 되는 것을 방해했다. 독일인들이 뒤늦은 국가를 이루게 된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독일은 사실상 몇개의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졌다. 또한 호족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1300년경에는 약 300여개의 크고 작은 영방들이 난립해 있었다. 이처럼 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수 백개의 영방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오랜 역사를 통해 별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